제목 파산·면책·시효소멸 알고도 “빚 갚아라”…불법 채권추심 기승    201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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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면책·시효소멸 알고도 “빚 갚아라”…불법 채권추심 기승

대부업법 시행 10년, 그후… (중)
대부업체 등 부실채권 산 뒤
갚을 의무 없는 빚까지 독촉
‘일부 갚으면 시효 부활’ 악용
“조금만 갚아라” 꼼수
부주의하게 채권 추심 넘기는
은행 등 ‘도덕적 해이’도 문제

‘귀하의 삼성·외환·우리카드 연체대금 335만4000원을 2012년 1월 양수받은 ○○대부금융입니다. 강제집행절차 착수를 통보합니다.’

지난 9월 평일 오후, 집에서 노란 서류 봉투의 우편물을 받아든 주부 김민서(가명)씨의 두 다리는 굳어버렸다. 정신을 차린 김씨는 창밖부터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봉투에 적힌 번호로 전화했다. “파산면책한 지가 5년 전인데요. 혹시 뭐가 잘못된 겁니까?” 예상 밖으로 대부업체 직원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저희도 사온 채권이라서요. 파산한지는 몰랐네요.”

대출이 크게 늘고 빚이 쌓이면서 최근 불법 채권추심이 확대되고 있다. 2010년과 2011년 불법 채권추심으로 경찰에 적발된 인원은 각각 242명, 254명이었으나 올해 1~8월 사이엔 1037명으로 급증했다. 은행·카드사·저축은행·대부업체 등의 채권이 여러 단계로 유통되며 추심이 변칙적으로 이뤄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파산·면책된 빚도 갚아라” 파산·면책돼 갚을 필요가 없는 빚 추심에 나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김민서씨가 그런 경우였다. 김씨의 카드빚 4000만원이 연체되기 시작한 건 2002년. 5년간 안간힘을 쓰다 결국 2007년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고 면책됐다. 빚을 갚으라며 집 앞에 찾아오는 추심원들은 김씨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잊을 만할 때쯤인 지난달 다시 채권 추심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2010년엔 □□신용정보회사의 채권 추심원이 대뜸 집으로 찾아왔다. 김씨는 “오후에 집에 있는데 30대 남성이 갑자기 찾아와 ‘카드빚 때문에 왔다’고 해 너무 놀랐는데, 파산면책 서류를 보여주자 돌아갔다”고 말했다. 면책 여부와 관계없이 채권이 신용정보회사들한테서 위임 관리받다, 지난 1월 대부업체에 다시 팔린 것이다. 앞으로 또 어디로 유통될지 알 수 없다는 게 김씨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조인숙 민생연대 상담실장은 “채권이 이 업체에서 저 업체, 또 다른 업체로 수만건씩 헐값에 팔리는 과정에서 면책된 채권인 걸 알면서도 한번 ‘찔러보는’ 수법으로 추심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며 “명백한 불법 행위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계속되는 독촉에 갚아야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소멸시효 완성’된 빚도 갚아라” 심지어 채권 소멸시효가 끝났는데도 갚으라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6월 ◇◇대부업체는 이선채(가명)씨의 채권을 매입했다. 2001년 연체된 카드대금 143만원에 이자까지 더한 469만원이었는데, 소멸시효는 완성됐다. 그럼에도 업체는 급여를 가압류하겠다고 통보하고, 이씨의 가족에게 전화해 찾아가겠다며 욕설을 했다.

추심원들은 때론 ‘일부만 갚으면 다 갚은 걸로 처리해주겠다’며 설득하기도 한다. 주의할 것은 소멸시효가 경과된 채권이라도 일부 돈을 갚게 되면 소멸시효가 다시 시작된다는 점이다. 송주홍 희망살림 상담실장은 “얼마라도 넣어주면 나머지 빚은 탕감해주겠다고 유인하는데, 일부라도 갚는 순간 시효가 새로 시작돼 본격적 추심이 시작되는 것”이라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걸 악용해, 헐값에 사온 채권들 중 몇 건이라도 걸리면 돈을 벌려는 수법”이라고 말했다.

이때 법원의 ‘지급명령’이 악용되기도 한다. 지급명령은 채권자가 신청하면 양쪽에 대한 별도 심문 없이 서면심리로 권리 인정 여부가 결정되는 ‘간이 재판’이다. 지급명령이 내려졌어도 소멸시효 완성 등 반박의 사유가 있을 경우 2주 안에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다. 채무자의 이의신청이 들어오면 법원은 양쪽 입장을 따지는 정식 재판을 연다. 법률 지식이 부족한 이들은 이의 신청의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이 ‘법률 지식 부족’ 상황을 악용해 지급명령만으로 ‘빚을 다시 갚으라는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며 상대방을 압박하는 경우가 적잖다는 점이다.

‘1차 채권자’ 금융사들의 해이 은행과 카드사 등 애초 업체 쪽에 추심을 맡기거나 채권을 파는 ‘1차 채권사’들의 도덕적 해이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추심 대상에서 제외돼야 할 채권을 면밀히 걸러내지 못하고 업체들에 넘겨 불법 추심의 대상이 되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파산·면책되고 6년 뒤 신용정보회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천혜림(가명)씨의 경우가 그 예다. 무역업체 직원이던 천씨는 2004년 회사가 한국무역보험공사의 보증서를 담보로 대출을 받게 되자 연대보증을 섰다. 회사가 망하자 은행에 대신 대출금을 갚은 공사는 추심에 나섰다. 갚지 못한 천씨는 2006년 파산·면책됐고, 2007년 공사는 이를 인지했다. 그런데 공사는 지난 4월 채권추심 위임 업체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부주의로 천씨를 그 대상자로 넘겼다. 신용정보회사는 지난 6월 천씨에게 전화해 변제를 독촉했다.

공사와 경찰청, 법률구조공단, 금융감독원 등에 억울함을 호소하던 천씨는 ‘일이 많아 오류가 났다’는 설명과 함께 민원을 취하해달라는 신용정보회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확실히 갚을 의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천씨는 “파산·면책받았다고 얘기해도 제 개인정보를 대며 다짜고짜 갚아야 한다고 하니까 법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파산이 취소된 건가’ 싶었다”고 말했다.

불법 채권추심에 대한 민원이 끊이질 않고 있으나 감독 조처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노회찬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채권추심 관련 민원은 2010년 2431건, 2011년 2857건, 2012년 상반기 1227건으로 나타났으나 고발 조처된 것은 2008년 이후 한 건도 없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